To. 집사님께
1863년 10월 26일, 스위스 제네바에서 회의 하나가 열립니다. 전쟁터에서 다친 사람이라면 우리 편이든 적군이든 따지지 말고 치료해 주자는 회의였죠. 국제적십자의 시작입니다.
그런데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합니다.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을 위해 내 시간과 힘을 공짜로 쓴다? 손해 보는 장사처럼 보이니까요.
하지만 심리학자들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. 2016년, 미국의 한 연구팀은 성인 77명에게 2주 동안 매일 저녁 두 가지를 물었습니다. 오늘 스트레스 받은 일이 있었나요? 오늘 누군가를 도와준 적이 있나요? 도움이라고 해 봐야 거창한 게 아니었습니다. 문 잡아 주기, 길 알려 주기, 과제 봐 주기 정도였죠.
결과는 어땠을까요? 스트레스가 많았던 날이라도, 남을 많이 도운 날엔 기분이 덜 가라앉았습니다. 같은 사람인데도 누군가를 도운 날과 안 도운 날의 하루가 달랐던 거죠. 심리학에서는 이걸 남을 도울 때 느끼는 쾌감, 헬퍼스 하이(Helper's High)라고 부릅니다. 누군가를 챙기는 동안 몸에서는 옥시토신이 나오고, 잔뜩 곤두섰던 긴장이 조금씩 풀립니다.
문제는 우리가 지쳤을 때 하는 행동이 정반대라는 겁니다. 번아웃이 오거나 사람에 치이면 답장을 미루고, 약속을 취소하고, 방문을 닫습니다. 당연합니다. 더 태울 장작조차 남지 않았는데 누굴 챙길 힘이 있을 리가 없죠. 그건 당신이 차가운 사람이라서가 아닙니다.
다만 문을 닫고 혼자 있는 동안에도 몸의 긴장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. 그러니 오늘 유난히 지쳤다면, 큰 걸 하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. 옆자리 동료 컵에 물을 채워 주거나, 한동안 연락 못 한 친구에게 "요즘 어때?" 한 줄 보내는 정도면 충분합니다. 남을 챙기려고 한 일인데, 정작 먼저 숨이 트이는 건 나일지도 모르니까요.
From. 심리학 고양이 |